열두 살 때 가족과 생이별 후 76번째 추석 맞은 정선화 할머니
“사진 한 장 못 챙긴 채 떠난 고향집… 죽기 전 한 번만 보고 싶어”
“이제는 다 세상을 떠났겠구나 싶다가도,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만이라도 알고 싶어요.”
추석을 앞둔 정선화(86) 할머니의 소원은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생사라도 확인하고 기억 속 고향집을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는 것이다.
황해도 봉산군 관수리 문수동. 현재 뇌경색으로 거동이 불편한 정 할머니는 75년이 흐른 지금도 고향 주소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1939년 12월24일 이곳에서 태어나 6남매 중 막내로 자란 그는 열두 살이던 1951년 고모와 단둘이 갑작스럽게 피란길에 올랐고 부모와 형제, 친척 모두 다시 만나지 못했다.
정 할머니가 고향을 떠난 것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사리원에 사는 고모 집에 놀러갔다가 국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1951년 1·4후퇴였다.
저녁을 먹던 중 폭격이 시작됐고 “이곳에 있다가는 죽는다”는 다급한 외침에 밥상을 그대로 둔 채 집을 나섰다.
정 할머니는 “한 일주일 정도 지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며 “옷이나 사진 그 어떤 물건 하나 챙기지 못하고 고모만 따라나섰다”고 회상했다.
군인들이 후퇴할 때 이용하던 화물열차에 올라 개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개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수많은 사람이 피란을 떠난 뒤였다. 정 할머니와 고모는 다시 서울로 향했다.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 안양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에는 숨진 사람들이 곳곳에 쓰러져 있었다. 피란민 사이에는 중공군도 섞여 있었고 폭격이 이어질 때마다 짐을 내던지고 몸을 피해야 했다.
그렇게 수원 인근까지 내려갔지만 중공군이 밀려오면서 더는 남쪽으로 가지 못하고 발이 묶였다.
이후 국군이 다시 진격하자 정 할머니는 서울로 돌아왔지만 고향으로는 올라갈 수 없었다. 돈 한 푼 없이 의지할 친척조차 없었던 정 할머니와 고모는 영등포에 자리를 잡았다가 할머니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인천으로 이주해 지금까지 살았다.
정 할머니는 “당장 먹고 살아야 했기에 어린 나이부터 길가에 좌판을 펴고 장사를 시작했다”며 “살아내느라 정신없이 세월을 보냈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고향이 남아 있었다. 명절이 다가오면 고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아릿한 기억이 떠올라 더 그리워진다”고 말했다.
북에서는 명절이면 분홍색 저고리와 검게 물들인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녹두부침개와 수수부침개를 한가득 만들어 채반에 담아 광에 뒀다가 하나씩 꺼내 데워 먹었던 모습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정 할머니는 “고향이 워낙 시골이라 차 한 대를 보려 해도 한참을 나가야 했던 기억이 난다”며 “언니·오빠와 고향집으로 걸어 들어가던 길목과 그 풍경이 모두 너무나 그립다. 죽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과거 이산가족 찾기 운동이 벌어졌을 때 가족들의 이름을 등록했지만 끝내 소식을 듣지 못했다. 등록된 이름을 보고 인척 한 명이 정 할머니를 찾아온 적은 있었지만 그 역시 자신의 가족 소식을 알아보려고 찾아온 것이었다. 서로가 찾던 가족의 생사는 끝내 확인하지 못했다.
TV를 통해 다른 이산가족이 헤어진 가족과 만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부러움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함께 피란 온 고모마저 세상을 떠난 뒤 정 할머니에게는 고향을 함께 기억할 친척도 남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떠나온 탓에 가족사진 한 장, 고향의 흔적이 담긴 물건 하나도 간직하지 못했다.
정 할머니는 “다 죽고 없겠구나 생각하면서도 생사라도 알고 싶다. 정부가 잘 해결해서 서로 오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죽기 전에 내 고향집을 한번만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산가족 상봉은 지난 2018년 8월 금강산에서 열린 ‘제21차 상봉행사’ 이후 8년째 열리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2000년부터 2018년까지 대면 상봉을 모두 21차례 진행했으며 대면상봉 4천290가족과 화상상봉 557가족을 합쳐 모두 4천847가족이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