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배경


이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된 위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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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페리노의 회고' (A Memory of Solferino) 150년의 의미

'솔페리노의 회고'(A Memory of Solferino) 150년의 의미

- 최은범교수 (국제인도법연구회 대표)

금년(2012)은 국제적십자운동의 바이블이라고 일컫는 앙리 뒤낭(Jean Henry Dunant, 1828-1910)의 저서 '솔페리노의 회고'(원명 Un souvenir de Solferino)의 간행 150주년이 되는 매우 뜻 깊은 해이다. 국제인도법의 역사는 적십자운동의 기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1859년 6월 오스트리아 황국 군대는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의 솔페리노에서 나폴레옹 3세와 후일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한 엠마누엘 2세 휘하의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 측에서는 1만4천여 명, 연합군 측에서는 1만5천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그때 제네바의 청년 실업가 뒤낭은 개인 사업차 우연히 솔페리노를 지나다가 그 전투로 부상당한 군인들이 제대로 구호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처참한 상황을 목격하고 그 지역주민 여성들과 함께 그들을 위한 긴급구호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제네바로 돌아간 뒤낭은 두 가지의 혁신적 제안이 담긴 '솔페리노의 회고'라는 수기를 쓰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을 자비로 인쇄 출판하여 스위스 국내의 사회지도층과 자선사업가 내지 박애주의 인사들뿐 아니라 당시 유럽 각국의 황실과 군부 지도자들에게 우송하였다.

무엇보다도 뒤낭은 그의 책에서 두 가지 혁신적 제안을 내 놓았다. 첫 번째 제안은 전시에 군대의 의무기관을 도와 부상자를 구호할 단체를 각 국내에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국제적십자운동(국제적십자위원회 즉 ICRC, 전 세계 187개국의 적십자사 및 적신월사 즉 NRCS, 국제적십자사 및 적신월사연맹 즉 IFRC로 구성됨)으로 구현되었다.

두 번째 제안은 각국 정부는 군대 의무기관과 요원 및 그들과 같이 일할 자원봉사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제공하는 신성불가침한 원칙을 국제조약으로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ICRC가 뒤낭을 포함한 '5인위원회'에 의해 1963년 2월 17일에 설립되었다. 같은 해 10월 29일, 제네바에서 열린 16개국 정부 대표와 박애주의 인사들이 참석한 국제회의에서 국제적십자운동의 창설을 가져온 10개항의 결의사항이 채택되었다. 그 후 ICRC의 초기노력으로 각국 내에 '부상자구호봉사단체'가 하나씩 설립되었으며, 드디어 1919년 5월 5일, 파리에서 그러한 봉사단체들의 국제적 연합체가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편 ICRC와 스위스 연방의회는 1864년 8월 8일부터 제네바에서 개최된 외교회의(Diplomatic Conference)에 유럽의 모든 국가뿐 아니라 미국, 브라질, 멕시코를 초청했었다. 그 결과 같은 해 8월 22일자로 '육전의 군대 부상자 상태개선을 위한 제네바협약'이 12개국 대표들에 의해 조인되었던 것이다.

분명히 말해서 "솔페리노의 회고"는 허구적인 소설이 아니다. 이 책은 이탈리아 통일전쟁의 일환이었던 솔페리노 전투의 현장에서 앙리 뒤낭이 직접 목격한 바를 - 물론 일부는 전문에 의한 것도 있지만 - 회상하여서 기술한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시간, 장소, 인물, 사건은 모두가 실제의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리얼리즘의 전쟁문학이라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뒤낭의 책은 공중에 나부끼는 군기, 진군의 나팔 소리, 장렬한 애국주의, 돌격, 승리, 개선...등 스펙터클한 측면만을 안목에 두던 19세기의 전쟁관을 일변시켰다. 한마디로 뒤낭은 전쟁의 비참한 상황을 사실 그대로 묘사하고 그것의 비인도성을 대담 솔직하고 적나라하게 고발함으로써 인간의 양심을 경각시켰던 것이다.

"솔페리노의 회고"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 부분에서는 전투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그것은 전쟁 사료 편찬이라는 위대한 전통의 서사시적 기술이다. 그러나 갑자기 필자인 뒤낭의 논조는 달라져서, 부상자와 시신이 한데 섞여 넘치는 교회 '키에사마죠레(Chiesa Maggiore)'를 묘사하는 냉혹한 기술로 전쟁의 숨겨진 내면을 벗겨낸다. 뒤낭은 그 형언할 수 없는 비참상, 즉 피물이 고인 웅덩이와 메스꺼운 냄새, 열려진 상처 위에 달라붙은 파리 떼, 고통을 부르짖는 일그러진 부상자들의 입 모양, 그리고 고통 받는 자와 이를 방치하는 자, 공포의 확산과 죽음을 여실히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뒤낭은 단순히 전쟁의 공포를 기술하는데 만족하지 않고, 책 말미에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 끝냈다. 그것은 사실상 인류의 양심에 대한 호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 모든 고통과 비탄의 광경들을 이야기했으며, 또 독자들에게 괴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는가? 왜 나는 비탄스러운 장면들에 만족이나 하듯이 지나칠 정도로 박진감 있게 묘사하였는가? 이것은 당연한 질문이다. 이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질문을 함으로써 대답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열성적이고 현실적이며 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자원봉사자들로써 전시의 부상자 간호와 구호를 목적으로 하는 구휼단체를 평시에 조직하여 둘 수 없을까?

이처럼 간단한 질문이 적십자(Red Cross) 창설의 영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러한 자원 봉사자들이 전선 가까이에서 자신의 구호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지위가 승인되고 존중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그의 두 번째 호소가 이어졌다.

"어떤 특별한 계기에, 예를 들면 쾰른 또는 샬롱에서 국적을 달리하는 전술의 대가(大家)들이 회동하는 것과 같은 계기에 다음과 같은 것을 바랄 수는 없을까? 즉 이러한 종류의 회의를 이용하여 신성 불가침한 성격을 지닌 조약에 의해 인정되는 어떤 국제적 원칙이 설정되어야 한다. 이 원칙은 일단 승인되고 비준되면 유럽 각국에서 부상자 구휼단체의 설립 근거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최초 제네바협약(Geneva Convention)의 채택으로 결실하였던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적십자의 경전(經典)이라 할 "솔페리노의 회고"는 본래 1862년에 <Un souvenir de Solferino>라는 표제로 프랑스어로 출간되었다. 초판은 저자의 자비로 1천6백부를 인쇄하여 제네바의 명사들과 자선사업가, 유럽 각국의 왕실 등에 보내졌다. 불과 1개월 후에는 파리, 세인트-페터스부르그, 라이프찌히 등지로부터 요청이 쇄도하여 1천부의 재판이 인쇄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 이듬해 3월에 가서는 단연코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되어 3천부의 3판 인쇄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솔페리노의 회고"가 출판되자 유럽 각국은 위대한 문호들의 입을 통하여 저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대는 인도주의를 무장시키고 자유의 운동에 공헌하고 있다. 나는 그대의 숭고한 노력에 찬성한다.
- 빅토르 유고(Victor Hugo)
그대의 저작은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 어네스트 르낭(Ernest Renan)
자비심 깊은 마음을 가진 다수의 대중이 그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는 다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누구나 전쟁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다.
공쿠르 兄弟(Edmond and Jules Goncourt)

그중에서 특히 찰스 디킨스는 런던에서 자신이 발행하던 <All the Year Round> 지상에 "白衣의 사나이(A Man in White)"라는 제목하에 '솔페리노의 회고'의 발췌문을 4회에 걸쳐서 연재하였다. 또한 저명한 프랑스 작가이자 악명 높은 문학평론가였던 공쿠르 형제는 "이 책은 호머보다 천배나 훌륭한 것이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앙리 뒤낭의 사상적 배경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기독교의 박애정신이었다. 당시 제네바의 상류사회는 칼빈주의의 영향으로 극히 준엄한 인생관이 풍미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종교적 도덕적 이상을 박애주의 사업으로 발휘하려는 풍조가 강했다. 스위스 국가의 세계주의적 경향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사회풍조, 그 위에 양친의 영향, 특히 온후한 어머니의 감화 속에서 아버지의 자선사업 활동에 따라다니면서 성장한 뒤낭은 어려서부터 종교적 감정이 풍부했으며 자선사업 에도 열중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그의 일생을 통하여 모든 행동의 근저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의 기독교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1855년 세계YMCA동맹 창설자의 한 사람이었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후일 적십자의 자원봉사자들을 가리켜 "참된 자비의 사마리아인들"이라고 하며 신약성경(누가복음 10장 30절 이하)에 나오는 "선행의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에 비유했다.

한편 1854년 크리미아 전쟁 시 전지에서 부상병들의 간호에 헌신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박애주의 행동은 뒤낭에게 크나큰 감명을 주었는데, 그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하여 "그녀의 영웅적이고 숭고한 희생의 전기는 역사의 기록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도 말한 바 있다.

일생동안 확고한 평화주의자였던 앙리 뒤낭은 그 당시로 보면 매우 혁신적이고 선구적이었던 몇 가지 아이디어를 주창한 바 있다. 그 중 일부는 오늘날 국제연합(UN), 세계인권선언, UNESCO, ILO, WHO, 상설국제중재재판소, 군비축소 등의 형태로 구현되고 있으니, 이는 과연 그의 "예언자적 사상가"로서의 됨됨을 입증하고 있다. 또한 노예제도 반대론자이기도 하였던 뒤낭이 1863년 제네바에서 발표한 논문인 "회교국가의 노예제도"는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에 결정적 영향을 준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스토우 작)>을 탄생시킨 감명의 소산이었다고 볼 수 있다.

적십자 사상(정신)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국제적십자의 탄생지인 스위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동북아시아의 오른 쪽 귀퉁이에 자리한 우리 한반도에서 앙리 뒤낭의 생시에 적십자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외적 주권의 완전 독립을 선포하고 출범한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1903년 1월 8일자로 1864년의 최초 제네바협약에 가입하였고, 이어서 2년 후인 1905년 10월 27일자 칙령 47호로 "대한적십자사 규칙"을 반포하는 역사적 용단을 내림으로써 역사상 국내 초유의 적십자운동이 발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강점 36년이란 암흑시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창립 10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오늘의 대한적십자사는 4,967,281명의 회원과 2,448,516명의 헌혈자를 비롯하여, 성인 적십자 봉사원 133,728명(4,312개 조직)과 청소년적십자(RCY)단원 229,592명(4,480개 조직), 그리고 14개 지사 및 15개 혈액원을 포함한 전국의 46개 사업기관에 소속된 직원 3,319명과 임.위원 347명 및 대의원 613명(이상 2011년 통계)이라는 문자 그대로 국내 최대의 자원봉사 조직체로 성장 발전하여 평시와 전시에 인간의 고난을 경감하는 인도적 사명을 나라 안과 밖에서 성실하게 수행하여 왔다.

특히 창립 100주년이 되던 2005년엔 북한적십자회를 포함한 세계 186개국 회원사들이 대거 참가한 '국제적십자 및 적신월사연맹(IFRC)' 제15차 총회 및 국제적십자대표자회의를 서울에 유치하여 성대히 치름으로써 국가와 적십자사의 위상을 함께 선양하는 쾌거를 이루었던 것이다.

한편 기억하기도 싫은 6.25 한국전쟁(1950∼53)은 동족상잔의 민족적 아픔과 피해를 남겼고 그것은 지금도 분단의 고통으로 계속되고 있지만, 그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체험에 근거하여 개정되고 완성된 현행 1949년 제네바 4개 협약의 적용상 적합도에 대한 최초의 시금석이 되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특히 UN군측과 공산군측은 정전협상 과정에서, 비록 교전 쌍방의 어느 정부에게도 발효하지 않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네바협약의 관련 규정을 준거규범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앙리뒤낭의 조국인 스위스에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그 국기의 색깔을 거꾸로 하여 제정된 '백지 적십자(A Red Cross on White Ground)'의 깃발은 오늘날 이 지구상 모든 곳에서 나부끼면서 "인도주의를 통한 평화로(Peace through Humanity)" 전진해 가고 있다.

'20세기의 성자' 알버트 슈바이쳐는 일찍이 이렇게 설파하였다.

적십자는 어둠을 밝혀주는 광명이다. 그 빛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인류의 상황 속에서 인도주의 운동의 욕구와 역할이 다양화되고 있는 가운데 적십자운동이, 흡사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얽히고설킨 밀림 속에서와 같이, 수많은 다른 행위자들과의 극심한 경쟁을 벌여야하는 현실에서 자체의 창설이념과 존재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창설자의 초심을 다시 읽어감으로써 새로운 지혜와 원동력을 찾아야 할 것이다.

1859년 6월, 스위스의 사업가 앙리뒤낭은 사업상의 일로 나폴레옹 3세를 만나기 위해 이탈리아 북부의 솔페리노 지방을 여행하게 됩니다.

이때 뒤낭은 프랑스 및 사르다니아 연합군 그리고 오스트리아군 사이의 참혹한 전투가 막 끝난 카스틸료네 마을에 들르게 되고, 이곳의 전쟁 직후의 비참한 광경에 충격을 받아 인근 마을 부녀자들과 함께 아군과적군의 차별 없이 전상자들을 돌보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제네바로 돌아온 뒤낭은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과 그의 체험을 '솔페리노의 회상(UnSo uvenir de Solferino)' 이라는 책으로 엮어 1862년 11월에 출판하게 됩니다.

이 책에서 뒤낭은 다음의 두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첫째, 상병자를 돌보기 위해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구호단체를 평시에 각국 내에 조직할 것

둘째, 상병자와 그들을 돌보는 구호요원을 보호하고 이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국제 조약을 체결할 것

그리고 이 책은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지지를 받게 됩니다.

뒤낭의 제안을 실현하기 위해 제네바 공익협의회의 귀스타브 므와니에(Gustave Moynier), 기욤 뒤푸르(Guillaume-Henry Dufour), 루이 아삐아(Louis Appia), 데오도르 모느와르(Theodore Maunoir)가 뒤낭과 함께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의 전신인 "국제부상자 구호위원회 (일명 5인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16개국 대표를 초청하여 1863년 10월 29일 제네바에서 외교 회의를 개최, 본회의를 통해 흰색 바탕에 붉은 십자 모양의 표장을 선정하고, 10개 조문의 적십자 규약을 채택함으로써 국제적십자운동이 정식으로 시작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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